햇살이 오래 머무는 오후였다.
창문을 반쯤 연 병실 안으로, 바람이 조심스레 스쳐 지나갔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서로의 숨결과 움직임만으로 충분한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그가 문득 작게 웃었다.
그녀도 따라 웃었다.
짧고 깊은 웃음이었다.
마치 오래된 비밀을 동시에 떠올린 듯한, 그들만의 리듬으로 꺼내는 기억 하나.
검정 교복, 바람에 펄럭이던 치맛자락.
맞은편 학교 축제 날,
운동장 너머로 처음 마주친 눈빛 하나로 서로의 계절이 바뀌어버렸던 그 시절.
누군가는 풋사랑이라 부를지도 모르는 시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단단해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동안 그 첫 순간을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감쌌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전부였던 날들까지 다시 손에 쥐듯 꾹 눌러 담는 것처럼.
그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어디선가 떠오른 기억처럼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잘하고 싶었던 날들이 많았다.
더 많이 웃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마음이
되돌아보니 오히려 그녀를 힘들게 했던 적도 많았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인정하게 된다.
지금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낯선 기분에 잠겨 있다.
어디로 가는 건지,
그 끝엔 무엇이 있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았다.
그의 손이 평소보다 조금 더 깊이 떨리고 있다는 걸.
그녀는 흔들림 없이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게 지금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방식이라는 걸 굳이 말로 묻지 않아도 알고있다.
그녀는 여전히 웃었다.
슬픔을 감추는 게 아니라,
이 시간마저도 함께 있고 싶어서.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걸어온 그의 노력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에게는 다 전해졌다는 듯이,
아무 일 없던 평범한 오후처럼.
그리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와 함께한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세상에 와서 가장 잘한 일이
그 사람 옆에 있는 일이었다는 걸.
그의 눈에서 조용히 한 방울이 흘렀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더 꼭 쥐었다.
창밖에선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있었다.
어떤것도 확실하지 않은 경계 너머에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아주 천천히
안녕을 연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