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허파 깊숙이 스며들었다. 벤치 위, 엊그제 내린 비가 맺힌 나뭇잎 끝에서 위태롭게 매달린 물방울 하나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작게 반짝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나지막한 숨소리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처럼 나른하게 반복됐다. 이 모든 고요함 속에서, 나는 그저 그 물방울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톡,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물방울이 사라졌다. 그 순간, 내 안의 어떤 막이 찢어지는 듯했다. 잊고 지냈던 한여름 밤의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착각. 오래전, 어설프게 피어났던 웃음소리 하나가 귓가를 맴돌았다. 공원 벤치, 아니, 그때는 어둠이 짙게 깔린 놀이터 벤치였을까. 앳된 나와 멍청하리만치 해맑던 내가 마주 앉아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나누는 듯 진지했던 그 순간이, 필름처럼 선명하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나는 그 어린 나를, 서투른 손짓과 갈곳 없던 눈빛을, 다시 한번 붙잡고 싶어졌다.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여리고, 또 얼마나 굳건했는지. 세상의 모든 아픔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작은 손바닥 안에 별을 담고도 행복해하던 그 바보 같은 용기.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지금 이 순간 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비 냄새 섞인 흙 내음, 옆에서 들리던 친구의 낮은 한숨, 그리고 내 심장을 두드리던 미숙한 열정. 온몸이 그 기억으로 젖어들었다. 차가운 벤치의 감각은 사라지고, 오직 그 시절의 뜨거웠던 열기와 쓸쓸함만이 나를 감쌌다. 잊고 싶었던 순간들조차 지금은 눈부신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시절의 '나'. 나는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난파선처럼, 통제할 수 없는 그리움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 알지 못함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깨달았다. 목구멍 깊숙이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후회나 미련이 아니었다. 그저, 사라져버린 조각들을 향한, 사무치게 아픈 애정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꾼다. 나뭇잎 끝의 물방울이 증발하듯, 생생하던 기억의 빛깔도 서서히 바래갔다. 하지만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손끝에 남은 차가운 벤치의 감각처럼, 그 모든 어설펐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는 희미해진 푸른빛 잔상처럼, 아련하게 빛나는 나의 어린 시절이 밤공기 속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조용한 간극을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쓸쓸함마저도 또 다른 그리움으로 변할 거라는 예감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