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이었다.
도윤은 작업실 불을 끄지 못한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끝내 저장하지 못한 곡 파일이 떠 있었고, 바닥엔 구겨진 악보들이 흩어져 있었다. 며칠째 멜로디 하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봄비가 조용히 내렸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편의점 앞인데… 혹시 아직 안 자?’
짧은 메시지였다.
도윤은 한숨처럼 웃고는 후드티 하나 걸친 채 아래로 내려갔다.
편의점 처마 밑에는 윤서가 서 있었다. 얇은 니트 소매 끝은 빗물에 젖어 있었고, 손에는 따뜻한 캔커피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또 밤새는 거지?”
“안 잤어?”
“네 생각나서.”
그 말은 이상하게도 비 냄새보다 먼저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두 사람은 오래된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새벽 두 시의 도시는 조용했고, 가로등 불빛은 젖은 도로 위에서 길게 흔들렸다. 윤서는 늘 그랬듯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오늘 지나가다 본 길고양이 이야기, 회사 앞 화분에 핀 이름 모를 꽃 이야기, 지하철에서 들은 우스운 대화 같은 것들.
도윤은 그런 윤서를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다. 세상을 아직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은 생각보다 드물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너는 왜 그렇게 사람들 걱정을 많이 해?”
윤서가 웃었다.
“그냥… 아픈 사람 보면 마음이 쓰이잖아.”
그 순간 도윤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래전부터 윤서를 바라보며 살아왔다는 걸.
사실 그는 오래 지쳐 있었다.
꿈을 좇는다는 건 생각보다 외로운 일이었다. 잘될 거라는 말보다 포기하라는 말을 더 많이 들었고, 사람들은 결과 없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음악을 만들수록 자신이 점점 비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윤서는 달랐다.
그녀는 도윤의 실패를 묻지 않았다.
대신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잤는지, 오늘 하늘은 봤는지를 물었다.
세상이 끝없이 성과를 요구할 때, 윤서만은 그의 마음이 먼저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주는 사람이었다.
며칠 뒤, 도윤은 심한 감기 몸살로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희미한 전등 아래에서 누군가 젖은 수건을 갈고 있었다.
윤서였다.
“왜 왔어…”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자 윤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화도 안 받고 연락도 없는데 어떡해.”
그녀는 죽을 끓이고 약을 챙기고, 흐트러진 작업실을 조용히 정리했다. 한참 후 도윤은 열에 들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너는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윤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만 바라봤다.
비가 그친 거리엔 새벽빛이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아주 작게, 윤서가 입을 열었다.
“네가 혼자 버티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마음이 아파.”
그 말에 도윤은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대단한 순간이 아니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늦은 밤 집에 무사히 도착했으면 안도하는 마음.
상처받은 얼굴을 보면 대신 울고 싶어지는 마음.
그게 사랑이었다.
그날 이후 도윤은 조금씩 달라졌다.
새벽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던 날들이 줄어들었고, 밥을 거르지 않게 되었고, 가끔은 작업을 멈춘 채 윤서와 강변을 걸었다. 그녀와 있으면 이상하게도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겨울이 오던 어느 날, 두 사람은 눈 덮인 공원을 걷고 있었다. 윤서의 목도리 끝에 작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았다. 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그는 말없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마치 쉽게 부서질 유리 조각을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윤서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도윤은 그 눈을 보며 생각했다.
살면서 이렇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느껴본 적이 있었나.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이 사람만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슬픈 날이 오더라도 혼자 울게 두고 싶지 않다고.
눈발 사이로 윤서가 천천히 웃었다.
그 순간 도윤은 알았다.
평생이라는 건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이 사람의 내일을 계속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