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가로등만이 낡은 버스 정류장을 지키는 한밤중이었다. 뼈아프게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 때마다, 아릿한 그리움이 심장을 훑고 지나갔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벤치에 몸을 기댄 나는, 문득 저 멀리서 들려오는 낡은 라디오의 잡음 섞인 멜로디에 귀를 기울였다. 어린 시절, 잊고 살았던 시간의 조각들이 먼지처럼 일어나는 듯했다.
정류장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어딘가 초라했고,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 그림자 속에서, 찰나처럼 스쳐 지나간 희미한 잔상 하나. 교복을 입고, 낡은 백팩을 메고, 두서없이 웃던 스무 살의 나.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눈부시게 어설프고, 뜨거웠던 나의 과거였다. 그 아이는 지금의 나를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한때는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던 꿈들이, 지금은 희뿌연 안개처럼 저 멀리 흐트러져 버린 것을 어렴풋이 알았을까.
차가운 유리창에 기댄 내 이마가 시큰거렸다. 그 아이의 눈빛, 그 아이의 열정이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것을 느꼈다. 더 높이, 더 멀리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맹목적인 기대감들. 대단해질 거라 막연히 믿었던 어설픈 확신.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저물어버린 석양처럼 멀리 사라졌다는 것을,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이루지 못한 꿈들에 대한 쓰라린 아픔과,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을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깊이 박혀 있었다.
가슴 속에서 아련한 멜로디가 터져 나왔다. 피아노의 느린 아르페지오가 한 음 한 음 박히듯,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단순히 슬픔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미숙했고, 서툴렀지만, 그래서 더욱 순수하고 빛났던 과거의 나를 향한 애틋한 포옹이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옅어져버린 기대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모습이 결코 초라하지 않음을, 오히려 충분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흐느낌 속에서도, 마침내 내 안의 모든 파도가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때, 저 멀리서 두 개의 빛줄기가 어둠을 가르며 다가왔다. 버스였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될 시간. 나는 벤치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밤공기는 여전했지만, 더 이상 심장을 아프게 할 만큼 시리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끌어안은 채, 나는 오늘을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다. 내 안의 모든 소란이 멎고, 고요한 평온만이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