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낡은 피아노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들이, 내 멈춰버린 시간을 흔들었다. 창밖은 따뜻한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테이블 위 커피잔에서는 옅은 김이 피어올랐다. 평범한 오후였지만, 그 선율 하나로 모든 것이 특별해졌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시절의 내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그대와 함께 걸었던 시간들, 좋았던 기억만큼이나 미안했던 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 웃게만 해주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내 눈물은 더 많았다는 것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 모든 회한이 한 줄기 빛처럼 나를 관통했다.
나는 그저 사랑한다는 말 말고는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던 사람이었다. 그대 손을 잡고도 늘 두려워했던 나의 어리석음.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 모든 소망은 그저 사랑한다는 한마디로 귀결되었다. 내가 더 잘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가. 지켜주고 싶었던 그 약속들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잔잔하던 피아노 선율이 서서히 드럼과 베이스, 일렉트릭 기타의 웅장함으로 물들어 갈 때, 내 안의 모든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찾아온 명확한 고마움. 그대가 내 전부였고,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진실. 그 모든 행복의 순간들이 눈앞을 스쳤다. 소리가 고조될수록 과거의 조각들이 선명해지다가, 이내 현재의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음악은 절정에 다다랐고, 이내 부드럽게 사그라들었다. 여운만이 공간을 채웠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사랑과 이별의 순간들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다는, 따뜻하고도 쓸쓸한 진실만이 남았다. 창밖은 여전히 회색빛이었지만, 내 안에는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그 기억들을 기꺼이 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