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저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늦가을도 아니고, 이제 막 겨울 초입인데 벌써 이렇게 춥다니. 내가 원래 추위를 좀 많이 타긴 했지.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텅 빈 놀이터에 퍼졌다. 삑, 삑, 하는 노이즈조차 이 밤에는 왠지 모르게 아련하게 들렸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일까…."
후렴 부분이었지. 카메라 감독님이 뒤에서 큼큼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촬영 중이었지. 언제나처럼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한쪽 손을 들어 브이 포즈를 만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내 모습은 화면 안에서 완벽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면 밖의 나? 뭐, 딱히 상관 없지 않나. 어차피 사람들은 화면 속의 나를 원하는 거니까.
"오늘 밤 브이로그는 여기서 마무리해볼까, 이클립스?" 감독님의 목소리가 무심하게 들렸다. 나름 베테랑이신 분인데, 언제나 이래. 내 속을 알 리 없는, 이 무미건조한 밤공기처럼. "팬들이 좋아할 만한 멘트 하나 날려줘야지."
"음… 오늘 밤, 이클립스와 함께 빛나는 밤이었나요?" 나는 내 트레이드마크인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듯한 눈빛은 아마 어둠 속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겠지. "언제나 그랬듯, 너의 우주를 훔칠게. 이클립스였습니다!"
컷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웃음을 지웠다. 가로등 불빛 아래, 텅 빈 놀이터 그네가 바람에 흔들리며 삐걱거렸다. 마치 잊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내 마음처럼. 아, 저 그네, 옛날에 너랑 같이 타던 그 그네랑 비슷하게 생겼네. 어쩌면 이 도시의 모든 그네가 다 비슷하게 생겼을지도 모르지. 기억은 그렇게 한 순간에 떠올랐다가, 또 한 순간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사라지곤 했다. 붙잡을 틈도 없이.
“감독님, 이 영상 편집은…” 내가 말을 꺼내려는데, 감독님은 이미 촬영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음악만 좀 더 깔끔하게 입혀주면 되겠네. 너야 뭐, 늘 잘 나오니까."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저 멀리, 빛바랜 놀이터 바닥에 뒹구는 낙엽들로 향했다. 한때는 푸르고 싱싱했던 잎들이었는데, 이제는 형체만 겨우 남은 채 바스러지고 있었다.
빛나는 무대 뒤. 언제나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줘야 하는 나. 잊고 싶지 않지만, 조금씩 잊히는 것들이 있다. 굳이 애써 되새기지 않으면 희미해지고, 끝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들. 나는 겉으로는 언제나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해왔다. 팬들은 내가 늘 활기차고, 장난기 넘치며, 늘 웃는 얼굴로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는 존재라고 생각할 거다. 실제로도 그래야만 했다. 그게 이클립스니까.
하지만 가끔 이렇게 혼자 남겨지는 순간이면, 잊고 싶지 않은 어떤 멜로디가 차가운 현실 속을 맴돌며 나를 흔들어 놓곤 했다. 마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처럼. 그 멜로디는 내가 너와 함께 만들었던 노래의 한 부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지.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흐려지고 있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 우리가 함께 했던 기억들조차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빛을 발할수록, 너는 내 기억 속에서 더욱 멀어지는 것 같았다.
"이클립스, 얼른 가자. 내일 촬영도 일찍 시작해야 해." 감독님의 재촉에 나는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챙겨온 휴대폰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 화면이 켜지며 나타난 잠금화면은, 한때 너무나도 익숙했던 얼굴을 보여주었다. 내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너의 얼굴. 언제나 지워야지, 지워야지 하면서도 차마 그러지 못했던 사진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문득, 그 웃는 얼굴이… 예전만큼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놀이터의 낡은 그네가 흔들리며 내는 삐걱이는 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치 잊히는 것을 막으려는 듯, 계속해서 울리는 경고음처럼. 내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정말로….